민족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며, ‘조선’ 과 ‘동아’ 두 신문의 쇠퇴와 소멸과정에 집중하여, 핵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방응모, 김성수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게 된 30년대와 40년대의 언론사 관련 시대의 흐름을 살펴보고, 이
민족지의 일제 시대사를 투쟁과 계몽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발행인의 공적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그는 일제하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독립신문]의 영광의 정신을 이어받은 두 민족지의 영광된 투쟁과 계몽의 발자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김성수 방응모 두
일제하에서는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한국의 민영신문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20년도이다. 그것도 일제하 광무신문지법이라는 제도권 하에서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그것을 포함한 다양한 제한적인 요소들 속에 일제하의 민영신문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을 어떻게 평가해야
위한 조사연구 실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허가, 왜?
당시 지하세계에서 활동하던 민족진영의 세력을 알아보기 위한 목적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
일제의 검열은 매우 심하였음
삭제·압수·과료처분·정간·폐간 등의 탄압이 극심하여 매월 평균 5, 6건에 이름
언론분야의 친일파를 대상으로 그 범위를 한정했다. 이는 ‘언론’이라는 생각과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을 통해서 그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은 시대를 어떻게 읽어내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언론의 두 핵심을 담당했던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조선일보의 방응모의 일대기와 그들
신문도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의 독보적인 위치에 차지하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그 당시 존재한 신문으로 친일논란의 대상에서 비껴 나가지 못한다. 이 두신문은 일제하시기 조선의 주권을 보호하고 민족수호를 위해 앞장섰으며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경영과 제작에 혁신을 단행하였다. 그 뒤 신석우 안재홍 유진태(兪鎭泰) 조만식(曺晩植) 등이 사장을 맡았으나,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인수 운영하면서부터였다.
방응모는 신문경영을 맡은 후, 총액 50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
문맹 타파와 한글 보급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운동이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총독부가...
... 논조와 주장이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불러도 좋을 정도의 항일적인 제작태도와 이에 걸맞는 논조를 보인 때도 분명히 있었다. 조선민중도...
언론의 상업적 측면의 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일신보>로부터 시작해서 그는 끊임없이 신문 소설을 연재하였다. 소설 한 편이 끝나면 바로 다음 소설을 집필했던 지라, 한 때는 <동아일보> 소설란의 지면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조선일보>에 실렸던 홍명희의 “임꺽정”
신문의 장지연 기자, 오적단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김동인 소설가, 서정주 시인, 안익태. 홍난파와 방일영 조선일보 초대사주, 인촌 김성수 동아일보 초대사주도 이에 포함됐다. 11.8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친일인사와 그들의 행적을 담은 소